세종포커스

[세종포커스] 한불 수교 140주년과 중강국(中强國) 협력의 새로운 설계 — 확장억제 불확실성 시대의 전략적 파트너십 —

등록일 2026-03-26 조회수 196 저자 정성장

2026년은 대한민국과 프랑스 공화국이 1886년 6월 4일 ‘조불수호통상조약(朝佛修好通商條約, Traité d'Amitié et de Commerce Franco-Coréen)’을 체결한 지 140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해이다.
한불 수교 140주년과 중강국(中强國) 협력의 새로운 설계
— 확장억제 불확실성 시대의 전략적 파트너십 —
2026년 3월 26일
    정성장
    세종연구소 부소장 | softpower@sejong.org
    Ⅰ. 서론: 수교 140주년, 새로운 출발선에 선 한불 관계
      2026년은 대한민국과 프랑스 공화국이 1886년 6월 4일 ‘조불수호통상조약(朝佛修好通商條約, Traité d'Amitié et de Commerce Franco-Coréen)’을 체결한 지 140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해이다. 에마뉘엘 마크롱(Emmanuel Macron) 프랑스 대통령이 4월 2일 방한하여 이재명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개최할 예정이다.1) 이는 2015년 올랑드(François Hollande) 대통령 이후 무려 11년 만의 프랑스 대통령 방한으로, 양국 관계의 새로운 도약을 예고하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

      마크롱 대통령의 이번 방한은 단순한 기념행사를 넘어선다. 미국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일방주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 러북 혈맹관계 복원과 군사협력 확대, 미국·이스라엘의 대이란 군사행동, 그리고 중국의 군사적 부상이라는 복합적 전략 환경 속에서, 한국과 프랑스는 각자의 전략적 자율성과 가치를 같이 하는 국가들과의 연대를 강화해야 하는 절박한 과제에 직면해 있다. 필자는 수교 140주년을 계기로 외교안보 분야를 중심으로 한불 관계의 궤적을 되돌아보고, 양국이 나아가야 할 전략적 방향을 제언하고자 한다.
    Ⅱ. 한불 수교의 배경과 외교안보 관계의 역사적 궤적
    1. 병인양요에서 수교까지: 갈등을 넘어선 첫 악수

      한불 관계의 첫 접점은 비극으로 시작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2) 로 프랑스인 선교사 9명이 처형되자, 로즈(Roze)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해군이 강화도를 침공한 병인양요가 발발했다. 이로 인한 불신의 앙금은 깊었고, 프랑스는 미국(1882), 영국·독일(1883)보다 뒤늦은 1886년에야 조선과 공식 수교하게 된다.

      그러나 수교 이후 프랑스는 조선이 국제사회에 알려지는 데 일정한 이바지를 했다. 1887년 부임한 초대 주한 프랑스 공사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Victor Collin de Plancy)의 통역사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3) 은 『한국서지(Bibliographie Coréenne)』4) 를 편찬하며 프랑스 한국학의 기초를 놓았다. 고려 시대 『상정고금예문』에서 대한제국기 『한성순보』에 이르기까지 3,821종의 한국 서적을 분류·정리하고, 단순 서명목록을 넘어서 각 책의 내용과 간행 상황, 저자 관련 사항 등을 해설한 해제 형식의 『한국서지』는 ‘한국학’이라는 용어조차 없던 시기에 전 세계에 배포된 최초의 본격적인 한국 문헌 해제집으로, 구한말 한국 고서 유통·소장 상황을 복원하는 핵심 근거 자료가 되고 있다.

      그러나 1910년 일제의 조선 강점 이후 양국 관계는 약 40년간 단절의 시대를 겪게 된다. 이 암울한 시기에도 한불 관계의 씨앗은 살아남았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 프랑스 조계(租界) 내에서 수립될 수 있었던 것은 프랑스 당국이 사실상의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해 주었기 때문이다. 김구, 이동휘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프랑스의 묵인 아래 활동을 지속할 수 있었고, 임시정부는 파리위원부(巴里委員部)5) 를 통해 국제사회에 독립을 호소하는 외교 활동을 이어갔다. 일제의 반복되는 독립운동가 인도 요구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가 조계지 내 임시정부 활동을 보호한 것은 오늘날 양국 관계의 소중한 역사적 유산으로 기억되어야 할 일이다.

    2. 한국전쟁: 피로 맺은 연대

      1949년 프랑스는 유럽에서 영국에 이어 두 번째로 대한민국을 공식 승인하였다. 이듬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는 몽클라르(Ralph Monclar)장군6) —육군의 ‘군단장급 장군(Général de corps d’armée)’이었지만, 유엔군 파병을 위해 스스로 계급을 낮춰 중령으로 자원한 노장—의 지휘 아래 총 약 3,400명의 프랑스군이 미 제2보병사단 23연대에 배속되어 3년간 한반도에서 싸웠다. 이 가운데 260여 명이 전사하고 1,000명 이상이 부상을 당하였다. 파병 인원 세 명 중 한 명꼴로 대한민국의 자유를 위해 피를 흘리거나 희생된 셈이다.7)

      프랑스 대대가 남긴 가장 상징적인 전공은 1951년 2월 지평리 전투였다. 미 23연대 전투단과 함께 수 배에 달하는 중공군의 포위 공격을 사흘 동안 감내하며 격퇴한 이 전투는, 유엔군이 중공군에게 처음으로 전술적 승리를 거두고 ‘중공군 무적 신화’를 깬 전환점이자, 이른바 ‘한국전쟁의 게티즈버그’로 불릴 만큼 전략적으로 결정적인 전투로 평가된다. 서울 재탈환의 전기를 마련한 이 승리로 프랑스 대대는 미군으로부터 부대 표창(Distinguished Unit Citation)을 수여받았으며, 한국 정부도 최고의 훈장으로 이들의 희생을 예우하였다. 프랑스는 유럽 국가 중 네덜란드·벨기에와 함께 보병대대급 실전 지상군을 투입한 몇 안 되는 나라였다. 파리 개선문의 ‘영원한 불꽃’ 의식에 ‘한국’이 명시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 피의 연대가 아직도 프랑스 국민의 기억 속에 살아 있음을 웅변한다.8)

    3. 군부 독재 시대의 한불 관계: 실용과 원칙 사이

      1950~80년대 한국의 권위주의 통치 시기 한불 관계는 실용주의와 원칙 사이의 긴장이 반복되는 시기였다. 드골(Charles de Gaulle) 대통령 치하의 프랑스는 1964년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는 등 독자적 외교 노선을 추구했으며, 한반도 문제에서는 남북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거리두기를 택했다. 경제개발이 본격화된 1970년대 들어서야 한불 관계는 뚜렷이 활성화되었다. 특히 원자력 분야 협력이 주목된다. 한국전력의 고리 원자력발전소 건설에 프랑스 프라마톰(Framatome)이 참여하였고, 1981년에는 ‘한불 원자력 협력 협정’이 체결되어 에너지 기술 협력의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오늘날 한불 원자력 협력의 잠재력은 이 시기에 심어진 씨앗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인권과 민주주의 측면에서 프랑스는 군부 독재 정권에 대해 공개적 비판보다는 조용한 외교적 접촉을 선호하는 실용주의 노선을 걸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에도 프랑스는 미국처럼 적극적 개입을 자제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지식인 사회와 언론은 한국 민주화 운동에 꾸준한 연대와 지지를 보내며, 한국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제 여론 형성에 기여하였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양국 관계는 보다 성숙하고 대등한 단계로 진입할 수 있었다.
    Ⅲ. 한불 외교안보 대화 140년의 평가와 과제
    1. 역대 한불 정상회담: 성과와 한계

      한불 간 최초의 정상급 교류는 1993년 9월 프랑수아 미테랑(François Mitterrand) 대통령의 방한으로 이루어졌다. 프랑스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한국을 찾은 미테랑은 외규장각 도서 반환 원칙에 합의하고 고속철도(TGV) 기술 이전을 논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당시 미테랑 대통령은 청와대로 김영삼 대통령을 방문해 외규장각 고문서 중 한 권인 「휘경원원소도감의궤(徽慶園園所都鑑儀軌)」 상권을 직접 전달했다. 그런데 의궤 한 권이 한국에 전달되기까지 프랑스 쪽에서는 크고 작은 파란이 있었다. 박물관 여직원이 껴안고 내놓지 않아 초조해진 대사관 직원들과 대사까지 나서서 길고 긴 설득작업을 벌여야 했던 것이다.9)

      이후 유럽순방에 나선 김영삼 대통령은 1995년 3월 첫 순방국으로 프랑스를 방문, 미테랑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한반도를 비롯한 국제정세 및 양국 간 우호협력 확대 방안을 협의함으로써 양국 관계를 공고히 하였다. 소르본 대학은 김영삼 대통령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했는데, 이는 700년 역사의 소르본 대학이 국가원수에게 최초로 수여한 명예박사학위였다.10)

      노무현 대통령은 드골 대통령을 존경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2004년 6월 『드골의 리더십과 지도자론』이라는 저서를 낸 외교통상부 이주흠 (전 주 미얀마 대사) 심의관을 대통령리더십비서관으로 발탁할 정도로 드골의 리더십에 큰 관심을 보였다. 윤광웅 당시 국방부 장관은 노 대통령에게 프랑스식 국방 개혁을 추진하겠다는 방침도 보고했다. 미국에 “할말은 하겠다”며 각을 세운 노 대통령의 정치 행태는 ‘위대한 프랑스’를 외치며 미국과 당당히 맞선 드골과 닮은 데가 있었다.11) 그런 노무현 대통령의 2004년 12월 프랑스 방문을 계기로 양국 정상은 ‘21세기 포괄적 동반자 관계’를 선언하고, 당시 약 50억 달러 수준이던 교역을 5년 내 100억 달러로 확대한다는 목표에 합의했다.

      2010년에는 사르코지(Nicolas Sarkozy) 대통령이 서울 G20 정상회의에 참석하는 기회에 145년 묵은 외규장각 의궤 297책의 반환이 합의됨으로써 오랜 역사적 상처가 치유되었다. 그런데 2015년 올랑드 대통령의 방한 이후 프랑스 대통령의 한국 방문은 무려 11년간 공백을 보였다. 이 공백 기간에도 정상 간 교류는 다자회의 계기로 이어졌다. 2018년 문재인-마크롱 정상회담에서는 한반도 비핵화 공조를, 2023년 윤석열 대통령의 파리 방문에서는 우크라이나 평화 회복 공조 및 첨단 기술·방산 협력 확대에 합의하였다.

      2025년 11월 G20 정상회의 계기에 이재명-마크롱 정상회담이 열려 양국 관계를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하기로 합의한 것은 중요한 진전이다. 마크롱 대통령은 “안보, 퀀텀, AI, 우주, 원자력, 재생에너지 등 다양한 분야의 협력”을 강조하며 올해 방한을 약속했다.12)

      그러나 정상회담 성과를 냉철하게 평가하면, 선언적 합의에 비해 실질적 이행의 깊이가 얕다는 한계가 반복된다. 2025년 3월 제5차 한불 외교장관 전략대화에서 양국 장관이 “양국의 안보가 상호 연결되어 있다”라고 확인한 것은 인식의 진전이나, 이를 제도화하는 구체적 메커니즘은 아직 미흡하다.

    2. 협력과 경쟁: 양면의 역사

      140년 한불 관계의 역사는 협력과 경쟁이 교차하는 복잡한 서사이다. 우호적 협력의 사례는 풍부하다. 원자력 기술 협력, 2009년 한-EU FTA 체결(2011년 발효), 다목적실용위성(아리랑 7호)의 프랑스령 기아나 발사, 2021년 핵안보 분야 공조, 2025년 한국 방위사업청(DAPA)과 프랑스 방위조달청(DGA) 간 우주·방산 협력 협정 체결 등이 대표적이다. 유엔 안보리에서 프랑스는 대북 제재 결의의 일관된 지지자로 한국의 든든한 파트너였으며, 2024년 러시아의 거부권 행사 이후에는 한·미·영·불이 공동으로 ‘다자제재모니터링팀(MSMT)’을 구성하여 대북 제재 이행 감시에 나서고 있다.

      반면 경쟁과 갈등의 국면도 존재한다. 방위산업이 대표적이다. 한국 공군이 차세대 전투기로 프랑스의 라팔(Rafale) 대신 F-35를 선택한 것, 폴란드·루마니아 등 동유럽 시장에서 K9 자주포·K2 전차 등 한국산 무기가 프랑스 방산기업들(Nexter, Dassault, Thales)과 치열하게 경쟁하는 것은 양국 방산 관계에 복잡한 음영을 드리운다. 원전 수주 경쟁도 민감한 사안이다. 한국이 2024년 체코 두코바니 원전 입찰에서 프랑스전력공사(EDF)를 누르고 수주한 것은 양국 원전 협력의 잠재력과 경쟁 구도가 혼재함을 보여준다. 2021년 AUKUS(미국·영국·호주 안보 협력체) 잠수함 협정으로 프랑스가 호주와 560억 유로 규모의 계약을 파기당한 사건은 프랑스의 방위산업 전략에 깊은 상처를 남겼으며, 이는 역설적으로 프랑스가 한국과의 전략적 협력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문화 분야는 고무적이다. 파리는 유럽 한류의 허브가 되었으며, 프랑스는 한국 영화·드라마·K-팝의 열렬한 수용국이다. 이러한 문화적 친밀감은 외교안보 협력의 사회적 지지 기반을 강화하는 소중한 자산이다.
    Ⅳ. 확장억제 불확실성 시대 한불의 전략적 안보협력 과제
    1. 한국의 높아진 위상과 전략적 자율성의 과제

      오늘날 한국의 국제적 위상은 수교 초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아졌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력, 세계 5~6위의 방위산업 수출국, 원자력·우주·반도체·조선 분야의 첨단 기술력, 그리고 민주주의와 법치의 모범으로서의 소프트파워를 갖춘 한국은 이제 단순한 원조 수혜국이나 분쟁 지역의 보호 대상이 아니다.

      이렇게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진 상황에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거래주의적 동맹관은 한국에게 근본적인 전략적 질문을 던진다. 미국의 확장억제(extended deterrence)가 여전히 유지되지만, 정치적 신뢰의 약화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이러한 확장억제의 불확실성이 구조화되는 시대에, 한국은 확장억제의 제도적 지속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그 공백 가능성에 대비하는 헤징(hedging) 전략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의 일부는 프랑스와의 전략적 협력 심화에서 찾을 수 있다.

    2. 전략적 협력의 핵심 어젠다

      140년의 역사적 경험—피의 연대, 1981년 원자력 협력 협정의 선례, AUKUS 충격 이후 프랑스의 새로운 전략적 필요—은 지금 이 순간 한불 전략 협력이 단순한 희망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가능하고 상호 이익에 부합하는 선택임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하에서 논의하는 한불 전략 협력 심화가 한미동맹을 대체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서 한국의 전략적 선택지를 복수화(複數化)하는 ‘동맹 포트폴리오의 다각화’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미국과 원자력·조선·방산·경제안보 분야에서 전략적 협력을 보다 발전시켜 가면서도 프랑스와의 협력 공간을 함께 확장해 가는 것, 이것이 지금 한국이 취해야 할 전략의 핵심이다.

      첫째, 핵추진잠수함 협력. 프랑스는 서방 세계에서 유일하게 저농축우라늄(LEU) 기반 핵추진잠수함을 운용하는 국가이다. LEU 기술은 고농축우라늄(HEU)을 사용하는 미·영 방식과 달리 핵확산 우려를 최소화한다는 결정적 강점이 있다. 2025년 10월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의 핵추진잠수함 건조를 승인하였으나, 미국의 원자력법(Atomic Energy Act)이라는 법적 장벽과 의회 절차라는 불확실성이 상존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랑스와의 LEU 기반 핵잠수함 협력은 미국과의 협력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 측 제도적 지연에 대비하는 보완적 선택지로서 전략적 가치를 지닌다. 프랑스의 LEU 기반 핵잠수함 운용 노하우와 한국의 세계 최고 수준 조선 인프라를 결합하는 협력은 양국 모두의 전략적 자율성을 획기적으로 강화할 ‘빅딜(Big Deal)’이다.13)

      둘째, 핵연료주기 협력. 프랑스 오라노(Orano)의 우라늄 농축·재처리 기술은 한국이 시급히 필요로 하는 분야다. 한국의 사용후핵연료 저장 용량은 2031~32년 포화 상태에 이를 전망이며, 이 문제의 해결 없이는 원자력 에너지 정책 전체가 위기에 처할 수 있다. 민수 핵연료주기 파트너십 구축은 에너지 안보와 전략적 자율성을 동시에 강화하는 협력 어젠다다.

      셋째, 인도-태평양 안보 공조 강화. 프랑스는 뉴칼레도니아·폴리네시아 등 해외 영토에 기반한 명실상부한 인도-태평양 국가다. 러북 군사협력의 심화로 한반도 안보와 유럽 안보가 직결되는 상황에서, 한불 인도-태평양 공동훈련·정보공유 메커니즘 구축은 양국 모두의 이익에 부합한다. 북한의 대러 수출 무기가 유럽 전선에서 NATO 병사들을 위협하고 있는 오늘, 프랑스가 한반도 문제에 보다 적극적으로 관여해야 하는 전략적 이유는 충분하다.

    3. 제도화를 위한 핵심 제언

      한불 전략적 협력을 선언적 수준에서 실질적 준동맹(quasi-alliance) 수준으로 격상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제도화 방안이 필요하다. 다음 세 가지를 핵심으로 제안한다.

      첫째, 한불 정상회담과 2+2 외교·국방장관회의의 정례화다. 현재 양국 간에는 외교장관 전략대화와 국방전략대화가 별도로 운영되고 있으나, 제도화 수준이 낮고 개최 주기도 불규칙하다. 한미 2+2 모델처럼 외교·국방장관이 함께 모여 포괄적 안보 협력을 논의하는 정례 채널을 구축해야 한다. 이는 2026년 정상회담 공동성명의 핵심 합의 사항으로 격상되어야 한다.

      둘째, MP5(Middle Power 5) 안보협의체 구축이다. 한국·일본·프랑스·영국·독일의 5개 중강국(中强國)14) 이 참여하는 안보협력 메커니즘은, 미국의 역할 공백을 보완하고 민주주의 가치에 기반한 규칙 기반 국제질서를 수호하는 새로운 다자 안보 틀이 될 수 있다. 이 구상의 실현 가능성은 이미 일정 부분 가시화되고 있다. 영국과 독일은 인도-태평양 전략을 채택하며 이 지역에 대한 관여를 확대하고 있으며, 일본 역시 G7 및 NATO 파트너 국가들과의 안보 협력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2026년 글로벌파이어파워(GFP)의 재래식 군사력 평가에서 한국·프랑스·일본·영국은 상위 5~8위를, 독일은 12위를 차지했다. 이들은 진정한 의미의 중강국이다. MP5 국가들의 국방예산, 즉 한국 500억 달러, 영국 715억 달러, 프랑스 637억 달러, 일본 570억 달러에 독일 약 900억 달러(2026년 증액 기준 추정치)를 더하면 약 3,300억 달러로, 중국(2,669억 달러)을 상회하고 미국(8,950억 달러)에 이어 세계 2위 수준이다. 그리고 프랑스·영국의 핵무기 보유, 일본·한국의 첨단 재래식 전력, 독일의 대규모 기갑·방산 역량을 포함하면 재래식+핵 복합 전력 기준으로 세계 3~4위권 수준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는 GFP 지수와 국방비를 토대로 한 개략적 추정치다. 그러므로 MP5가 출범하게 되면 기존의 국제질서에 지각변동을 가져올 잠재력을 가진 새로운 행위자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 정부는 한불 정상회담을 계기로 이 구상을 공식화하고, 프랑스가 유럽 파트너들을 설득하는 역할을 맡는 협력이 필요하다.15) 만약 MP5 안보협의체의 사무국을 서울에 설치할 수 있으면 한국이 MP5 국가들 간의 전략적 협력을 이끌어내는데 보다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참가국들이 동의한다면 위에 언급한 5개국 외에 캐나다, 호주, 이탈리아 등이 참여하는 MP6나 MP7 또는 MP8으로 시작하거나 확대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한불 고위급 방산군수공동위원회의 내실화다. 현재 양국 방산 관계는 경쟁과 협력이 뒤섞인 불분명한 상태에 있다. 경쟁 구도를 협력 구도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양국간 미래 무기체계 소요를 고려해 공동개발, 합작생산, 제3국 공동마케팅과 진출 등 구체적 협력 모델을 제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Ⅴ. 결어: 유라시아 양 끝의 전략적 파트너십을 위하여
      병인양요의 포성에서 시작된 한불 관계가 임시정부의 피난처를 거쳐, 지평리 전투의 피와 땀을 나눈 혈맹적 연대로 성장하고, 오늘날 첨단 기술과 전략적 이익을 공유하는 동반자 관계에 이르기까지 140년의 여정은 전혀 단순하지 않았다. 협력과 경쟁, 신뢰와 오해, 단절과 복원이 교차하는 이 역사 속에서 중요한 변화가 있다면, 이제 대한민국이 프랑스와 영국, 독일 등과 대등한 협력이 가능해질 정도로 국제무대에서 위상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4월 마크롱 대통령의 방한은 한불 관계를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시킬 결정적 기회다. ‘전략적 동반자 관계’라는 선언에 실질적 내용을 채워 넣는 것—정상회담과 2+2 외교·국방장관회의의 제도화, 핵추진잠수함 협력의 첫 발, MP5 안보협의체 구상의 공식화—이 이번 정상회담의 과제다. 이 세 가지 과제는 한미동맹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보완하고 강화하는 방향에서, 한국의 전략적 선택지를 넓히는 작업이다. 확장억제의 불확실성이 커지는 시대일수록 동맹의 다층화와 협력의 다각화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유라시아 대륙의 양 끝에 자리한 두 중강국이 자유·법치·다자주의라는 공통 가치 아래 외교·안보 분야에서 전략적으로 협력한다면, 그것은 한불 양국만이 아니라 세계 질서 전체에 기여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제 한불 관계의 새로운 140년 역사를 함께 써 내려갈 시점이다.

    1) 송승섭,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내달 2~3일 국빈방한…李대통령과 정상회담,” 『아시아경제』, 2026.3.13.
    2) 병인박해(丙寅迫害)는 1866년(고종 3년)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시작되어 1870년대 초까지 이어진, 조선 후기 최대 규모의 천주교 박해 사건이다. 흔히 병인사옥(丙寅邪獄)이라고도 부르며, 수천~수만 명에 이르는 천주교 신자와 프랑스 선교사들이 체포·처형된 사건으로, 이후 병인양요(1866) 등 대외 충돌의 빌미가 되었다.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모리스 쿠랑 (Maurice Courant)」 항목 참조.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80217 (검색: 2026.3.21)
    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서지 (韓國書誌)」 항목 참조.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80209 (검색: 2026.3.21)
    5) 파리위원부는 제1차 세계대전 후 파리강화회의를 계기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열의 대(對)유럽 외교 기관, 즉 ‘임정 주파리 대표부·한국 대표부’를 가리키는 이름이다. 김규식을 중심으로 1919년부터 1920년대 초까지 파리를 기반으로 활동하며, 파리강화회의와 각종 국제회의·언론을 통해 한국독립 청원서 제출, 선전·공보 활동, 유럽 각국 인권·사회당 세력과의 연대를 추진한 독립운동 외교 거점이었다.
    6) 한국전쟁 직전 몽클라르(Ralph Monclar, 본명 Raoul Charles Magrin-Vernerey)의 공식 계급은 프랑스 육군의 ‘군단장급 장군( Général de corps d’armée )’, 즉 미군 체계로 치면 중장(3성 장군)에 해당하는 계급이었다. 다만 프랑스가 한국전쟁에 ‘대대(battalion) 규모 부대’만 파병하기로 하자, 직접 지휘하기 위해 스스로 계급을 중령(lieutenant-colonel)으로 낮추고, 이 계급으로 프랑스 대대장 자격으로 참전했다.
    7) Esther Chung, “[Heroes from afar] French, Korean soldiers forged close bonds during war,” Korea JoongAng Daily, October 4, 2020.
    8) 이영창, ““한국 가겠다”며 네 계급 셀프 강등… 프랑스 4성장군, 6·25 판을 뒤집다 [명장],” 『한국일보』, 2025.12.4. 참조.
    9) 행정안전부 대통령기록관 사이트의 「외규장각 의궤의 반환, 프랑수와 미테랑 (Francois Maurice Adrien Marie Mitterrand)」 항목 참조. https://www.pa.go.kr/portal/contents/stroll/special/view.do?bd_seq=34 (검색: 2026.3.21)
    10) 위의 자료.
    11) 박제균, “盧대통령은 ‘프랑스 코드’…‘할말하는 행보’ 드골 빼닮아,” 『동아일보』, 2005.4.29.
    12) “[현장영상+] 이 대통령,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첫 정상회담,” 『YTN』, 2025.11.23.
    13) 정성장, “핵잠수함 시대를 여는 열쇠: 한미 핵연료 협력 로드맵 — ‘한국 건조·미국 연료 공급’ 모델의 실현 경로 —,”『세종포커스』, 2025.12.15.; 정성장, “한국-프랑스 핵추진잠수함 협력 전략과 로드맵 — 저농축우라늄 기반 함정통합과 상호 호혜적 파트너십 모델 —,” 『세종포커스』, 2026.02.10. 참조.
    14) 여기서 ‘중강국’(middle power)이란 초강대국(superpower)과 소국(small state) 사이에 위치하면서, 특정 분야에서 독자적 군사력·경제력·기술력을 보유하고 다자 외교에서 규범 형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국가를 가리킨다 본고에서는 특히 재래식 군사력 세계 5~15위권이면서 핵·우주·첨단기술 분야에서 독자적 역량을 갖춘 국가로 한정하여 사용한다.
    15) 필자의 기존 연구로서 정성장, “포스트–확장억제 시대의 새로운 안보 아키텍처 — 한·일·프·영·독 ‘중강국 5개국(MP5) 안보협의체’ 구축 구상 —,” 『세종포커스』, 2026.02.24. 참조.



※ 「세종포커스』에 게재된 내용은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으로 세종연구소의 공식견해가 아님을 밝힙니다.


세종연구소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