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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포커스] 경주 APEC 정상회담과 한국의 과제

등록일 2025-11-17 조회수 233 저자 이상현

파일명 경주 APEC 정상회담과 한국의 과제 저자명 이상현 수석연구위원

10월 31일부터 11월 1일까지 경상북도 경주에서는 2025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개최됐다. 대한민국이 의장국으로서 APEC 회의를 주최하는 것은 2005년 부산 정상회의 이후 20년 만의 일이다.
경주 APEC 정상회담과 한국의 과제
2025년 11월 17일
    이상현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 shlee@sejong.org
    | 2025년 경주 APEC 정상회의 개최
      10월 31일부터 11월 1일까지 경상북도 경주에서는 2025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개최됐다. 대한민국이 의장국으로서 APEC 회의를 주최하는 것은 2005년 부산 정상회의 이후 20년 만의 일이다. 회의 의제는 ‘지속가능한 내일(Building a Sustainable Tomorrow)’을 주제로, ‘연결(Connect)’, ‘혁신(Innovate)’, ‘번영(Prosper)’을 핵심 가치로 다룰 예정이다. 회의의 세부 주제 중 ‘연결’은 아태지역 내 무역투자 활성화 및 물리적, 제도적, 인적 교류를 통한 연결성 강화를 추구한다는 취지다. ‘혁신’은 디지털 강국으로서 디지털 격차 해소 및 AI 협력을 통한 디지털 혁신을 촉진하는 게 목표다. ‘번영’은 에너지, 식량안보, 인구구조 변화 등 글로벌 현안 공동 대응을 통해 아태 지역의 지속 가능하고 포용적인 성장과 번영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한국 정부는 주최국으로서 이 회의를 통해 아태지역은 물론 세계에 전달할 성과사업(deliverables)을 고민해왔다. 한국은 의장국으로서 AI 전환 및 인구구조 변화에 대한 공동 비전과 회원 간 구체 협력 방안을 제시하는 ‘AI 협력’ 및 ‘인구구조 변화 대응’ 등을 올해 APEC 핵심 성과로 제시했다. AI 협력은 AI 역량 강화, 지속가능한 AI 투자 생태계 조성에 초점을 맞춘 APEC 차원의 AI 활용 방향성을 제시하는 게 골자다. 인구구조 변화 대응은 인구구조 위기를 미래 성장과 혁신의 기회로 전환하기 위해 고령사회 대응 시스템, 인적자원 순환 강화, 의료 및 기술혁신 촉진 등 APEC 정책 협력안을 제시하는 게 목표다. 두 가지 주제는 아태지역 경제·사회 전반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나, APEC 정상 차원에서 논의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로써 이재명 정부는 한국 외교의 ‘슈퍼 위크’를 성공적으로 보냈다. 2025년 APEC 정상회의는 최근 지정학적·지경학적 불확실성이 증대되고 있는 전환기적 상황에서 개최되어, 세계 경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21개 회원국들이 한 자리에 모여 아태지역의 공동 번영에 대해 논의한다는 데 의의가 있다. 특히 이번 정상회의가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전세계를 상대로 시작한 관세전쟁의 혼란 속에서 갈수록 위축되는 자유무역과 다자협력을 되살리는 계기가 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경주 APEC 정상회의는 이 혼란스런 국제정세 속에서 다자협력과 규칙기반 국제질서의 불씨를 되살리는 계기가 될 수 있을까? 근간 국제질서를 뿌리부터 흔드는 것은 중국이나 러시아, 혹은 북한도 아니고 바로 미국이다. 트럼프 2기 들어 더욱 강해져서 돌아온 미국우선주의는 전세계를 유례없는 불확실성과 대결적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다. 미국은 2차대전 이후 규칙기반의 국제질서를 설계하고 인도한 자유세계의 지도자로서 세계질서 유지를 위한 공공재를 제공해왔다. 그동안 미국은 안보공약을 통한 글로벌 질서 유지, 자유로운 무역통상 질서 유지를 주도해왔지만 이제 그러한 역할을 중단하고 미국의 국익을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이기적 초강대국으로 진화하는 중이다. 그리고 국제기구나 레짐을 통해 작동하던 글로벌 거버넌스는 뒷선으로 후퇴하고 적나라한 힘과 이익의 잣대가 그 자리를 대신할 전망이다.
    | 경주선언의 주요 내용과 평가
      2025년 경주 APEC 정상회의는 21개 회원국 만장일치로 경주선언(Gyeongju Declaration)을 채택하고 폐막되었다. 다음 정상회의는 내년 11월 중국 선전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선언문은 올해 APEC의 주제인 “지속가능한 내일의 건설(Building a Sustainable Tomorrow)” 아래 Connect(연결), Innovate(혁신), Prosper(번영) 등 세 가지 우선축을 제시했다. 특히 두 가지 핵심 실천과제로서 한국의 주도로 인공지능(AI)과 인구구조 변화(고령화ㆍ저출산)에 대응하는 협력 프레임워크가 명시적으로 포함되었다. 이는 향후 디지털 전환과 AI 기술을 통한 경제·사회 혁신을 통해 미래 노동시장·산업구조 변화에 대응하는 역내 국가들의 흐름을 강화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전망된다.

      무역·투자 환경 회복 노력 및 공급망 안정화와 관련해 선언문은 아태지역에서 무역과 투자가 성장과 번영에 필수적이라는 점을 재확인하고, 변화하는 글로벌 환경 속에서 ‘회복력 있는’ 무역·투자 환경 조성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미·중을 비롯한 전략적 경쟁이 심화되는 가운데, 아태지역 내 공급망 안정화와 경제 다변화 논의가 두드러졌다. 경주선언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 출범 이후 다자무역 질서가 흔들리는 현실이 반영됐다. 하지만 보통 역대 정상선언에 담기는 자유·다자무역과 WTO를 지지하는 직접적인 표현이 빠지고 ‘무역·투자 환경 중요성 인식’이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문안 수준이 기존보다 후퇴한 것을 평가된다. 지난해 페루 APEC 정상선언에서 자유·개방·공정·비차별·투명·포용·예측 가능 등 가치에 준거한 무역·투자 환경의 중요성을 언급했고, WTO 기반 다자무역 체제의 지지를 재확인한 것과 대비된다. 경주선언에서 돋보이는 또 다른 것은 문화창조산업을 아태지역의 신성장 동력으로 인정하고 협력 필요성을 명문화한 점이다. 문화창조산업이 정상선언에 명시된 건 처음이다. 우리 정부는 향후 우리 ‘K컬처’가 아태지역 내 성장 동력으로 자리 잡는 계기가 마련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APEC 결과물은 미·중 입장이 절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APEC의 의사결정은 컨센서스(표결없는 전원 동의) 방식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한 회원국이라도 끝까지 반대하면 무산된다. 1989년 APEC이 출범한 이후 정상선언이 도출되지 않은 건 트럼프 행정부 1기 때인 2018년 파푸아뉴기니 APEC이 유일하다.

      한국은 이번 회의를 계기로 ‘실용적 중견국 리더십’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번 회의는 경주를 국제무대에 부각시키는 계기가 됐으며, 한국이 향후 지역·글로벌 협력의 플랫폼으로서의 위상을 확보했다는 긍정적 진단이 나온다. 선언문 채택을 통해 회원국들이 적어도 공통의 문제의식(디지털 혁신, 인구구조 변화, 투자·무역 복원력)을 확인한 것은 의미가 크다. 한국이 주도해 AI·인구변화 대응이라는 미래지향 이슈를 APEC 아젠다로 공고히 한 것은 큰 외교적 성과라 할 수 있다.

      다만, 경주선언이 단지 선언문 수준에서 머무르는 만큼 실질적 실행력과 구체적 후속 조치가 앞으로의 관건이 될 것이다. 또한 기존의 자유무역·다자주의 질서가 흔들리는 가운데, APEC이 과거처럼 강한 규범적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지 여부도 주목된다. 경주선언은 ‘무역자유화·투자개방’의 전통적 APEC 어휘를 상당 부분 피해 갔다. 미국은 선언문에서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규범에 기반한 무역’ 식의 표현을 최대한 희석하려 했고, 실제로 그 방향으로 조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가디언은 “자유무역의 시대는 끝났다”는 카니 캐나다 총리의 발언을 부각시키며, 이번 회의가 그 흐름을 제도적으로 확인한 장면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본회의 전체를 소화하지 않은 탓에, 끝부분 메시지에서 미국의 존재감이 약했고 그 공간을 중국이 채웠다. 그래서 일부 외신들은 이번 회의를 ‘중국이 조용히 이익을 본 회의’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 ‘전술적 휴전’을 택한 미중 정상회담
      금년 APEC 정상회의에서 국제적으로 가장 관심을 끈 것은 단연 미중 정상회담이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회담 전인 10월 20일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예정돼 있는 시진핑 중국 주석과의 정상회담과 관련, “훌륭한 무역 협정을 맺을 것이고 양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환상적일 것”이라며 “양국 모두에 좋은 무언가를 만들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협정이 체결되지 않을 경우 11월 1일부터 중국산 수입품에 대한 관세가 잠정적으로 155%까지 인상될 수 있다”고 했고, 미국이 중국의 희토류 수출 통제에 맞서 관세나 비행기 부품 같은 ‘지렛대’를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미중 정상회담의 핵심 합의사항은 우선 관세 및 무역 긴장 완화이다. 미국은 중국에 부과 중인 펜타닐 마약 관련 세율을 기존 20%에서 10%로 낮추기로 했고, 대중국 상호관세 24%에 대한 유예도 1년간 계속하기로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예고했던 대중국 추가 관세 100%도 없던 일이 됐다. 또 9월 이후 내놨던 미국의 ‘통상 블랙리스트’ 확대, 중국의 희토류 수출통제 강화 등의 시행을 1년 미루기로 했고, 양측은 상대국 선박에 대한 입항 수수료 부과 등도 유예하기로 했다. 중국은 또 미국산 대두를 구매하기로 했는데, 이는 공화당 지지세가 강한 미 중서부 지역 표심에 긍정적 요인으로 꼽힌다.

      이러한 합의를 통해 미중 양국은 일단 파국은 막았지만 주요 언론들은 이번 미중 정상회담을 ‘전면적인 관계 재설정(major reset)’보다는 ‘전술적 휴전(tactical truce)’ 수준으로 해석하고 있다. 양국은 트럼프 대통령이 내년 4월 중국을 방문하고, 이후 시 주석이 미국 플로리다주 팜비치나 워싱턴DC로 답방하여 추가적인 협상을 이어갈 계획이다.

      일각에선 경주 정상회담이 2013년 6월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과 시 주석이 캘리포니아주 랜초미라지의 휴양 시설인 ‘서니랜즈(Sunnylands)’에서 가진 첫 번째 비공식 정상회담을 연상케 한다는 말도 나온다. 당시 오바마 행정부가 ‘아시아 선회(Pivot to Asia)’ 정책을 펼치자, 중국이 이를 자국 안보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며 양국 간 긴장이 고조됐지만 서니랜즈 정상회담을 거치며 양국은 ‘협력적 경쟁과 상생’으로 관계를 재설정했다. 2년 전인 2023년 11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APEC 정상회의가 개최되는 동안에도 조 바이든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 간의 정상회담이 열렸다. 당시 회담에서 양국 정상은 펜타닐 등 마약 유통 차단, AI 위험 대응 등 일부 이슈에 협력을 약속했으나, 첨단기술 수출통제, 대만 문제 등 핵심 쟁점에서는 뚜렷한 시각 차이를 드러냈다.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 1기의 대중국 공세를 대부분 이어받았고,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이어진 대중 견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이름만 ‘디커플링(탈동조)’에서 ‘디리스킹(위험 축소)’으로 바뀌었을뿐 글로벌 기술·자원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려는 목적은 변하지 않았다.

      지금 상황은 그 때와 많이 다르다. 중국의 국제적 위상은 확연히 높아졌고 ‘위대한 중화민족의 부흥’을 꿈꾸는 시 주석이 트럼프의 압박에 굴복할 가능성도 없다. 그간 미중관계의 곡절을 감안한다면 경주 회담 한 번으로 미중 대결구조가 조만간 완화될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미중 모두 현재의 전략경쟁을 서로의 명운이 걸린 ‘질 수 없는 게임’으로 상정하는 한 미중 대결구도는 계속될 것이다. 다만 경주를 계기로 서니랜즈 회담처럼 미중관계가 관리 가능한 해빙의 길로 들어설지, 혹은 장기적인 ‘신냉전의 구조화’로 갈지는 두 지도자의 결단에 달렸다.
    | 한미, 한중, 한일 정상회담의 성과
      한미관계는 정상회담 전 미국이 부과한 고율의 관세를 피하고자 한국이 제안한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패키지의 구체적인 이행 방식을 둘러싼 이견으로 교착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경주 정상회담에서 양국은 이러한 교착 상태를 타개하고 포괄적인 합의를 도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한국은 3,500억 달러 대미 투자 계획을 최종적으로 확정하되, 현금 투자는 연간 200억 달러 상한을 두어 단계적으로 이행함으로써 자국 경제에 미치는 충격을 최소화하는 방안에 합의하였다. 이 투자 패키지에는 2,000억 달러의 현금 투자와 1,500억 달러 규모의 조선업 협력이 포함되었다. 또한 한국은 2035년까지 국방비를 GDP의 3.5% 규모로 증액하기로 합의하였다. 대신 미국은 한국산 수입품에 대한 상호 관세를 기존 25%에서 15%로 인하하기로 합의하였으며, 이는 특히 한국 자동차 산업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평가된다.

      한미 정상간 만남에서 가장 큰 화제를 모은 것은 미국이 한국의 오랜 숙원 사업이었던 핵 추진 잠수함(SSN) 건조를 전격적으로 승인한 점이다. 정상회의 모두 발언에서 이 대통령은 미군의 역내 방위 부담 경감을 명분으로, 재래식 무기를 탑재한 핵 추진 잠수함용 핵연료 공급을 미국 측에 공식 요청했다. 이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은 다음 날 자신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이 요청을 “승인했다”고 발표하여 한국측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합의에 따르면, 잠수함은 미국 필리조선소에서 건조될 예정이나 해당 조선소는 현재 핵 추진 잠수함 건조에 필요한 시설을 갖추고 있지 않아, 막대한 추가 투자와 기술적 난항이 예상된다. 뿐만 아니라 핵연료 확보와 관련해 ‘한미원자력협정’ 틀 안에서 가능한지, 아니면 별도의 조약이나 의정서 형태의 새로운 법적 틀이 필요한지도 검토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핵연료 물질과 관련 기술은 행정부 내의 여러 부서는 물론 의회의 검토 및 승인 절차를 거쳐야 할 가능성도 있다. 또 만일 잠수함이 한국이 아니라 필리조선소에서 건조되고, 핵연료까지 장착한 상태로 한국에 인수된다면 한국이 얼마나 운용상의 재량권을 갖게 될지도 주목할 부분이다.

      한중 정상회담을 통해서 한국과 중국은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를 재확인하고 경제 및 민생과 관련된 7건의 MOU를 체결했다. 이를 통해서 한중 양국은 대내외적으로 한중 간 경제협력과 교류 확대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키고 향후 한중관계의 회복과 발전에 긍정적 환경을 조성했다. 그러나 북한 비핵화, 서해 구조물, 한한령(限韓令), 중국의 수출통제 등 한중 간 현안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합의나 성과가 도출되지 않아 이러한 외교·안보 사안에 대해서 한중 간 입장 차와 이견이 존재함이 드러났다. 또한, 중국은 양자관계를 넘어 다자주의, 아시아태평양공동체 등 거시적 차원의 협력을 강조하며 미중관계의 관점에서 한국과의 관계를 풀어나갈 것을 시사했다. 하지만 최근 중국이 서해 한·중 잠정조치수역(PMZ)에 무단으로 설치한 구조물에서 잠수부 등이 활동 중인 정황이 포착되면서 향후 양국 간에 갈등의 소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 중국 정부는 줄곧 “연어 양식을 목적으로 하는 순수 어업 목적의 시설물”이란 입장이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구조물들이 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한 중국의 ‘알박기 시설’일 가능성을 제기한다. 만일 서해 구조물이 남중국해에 산재한 중국의 인공섬들처럼 사실상 영토주권을 행사하는 지역으로 기정사실화될 경우 이는 한국의 해양주권에 대한 심각한 침해다.

      또한 한국이 중국에게 기대했던 남북관계에서의 역할에 대해서는 진전이 없었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이재명 정부는 남북 대화 재개를 위한 한중 전략적 소통을 기대했다. 하지만 한국이 남북관계 개선에서 중국의 역할을 강조할수록 중국은 북한과의 협력 관계를 과시하고 북한과의 관계를 지렛대로 활용해 한국을 회유하고 압박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 때문에 남북관계와 관련해서는 중국의 역할에 대한 과도한 기대를 내려놓고, 그 대신 북한의 안보 위협이 중국이 추진하는 다자주의, 경제협력, 공동번영에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하며 중국의 책임 있는 행동을 요구해야 한다.1)

      한일 정상회담은 미래지향적 한‧일 협력 기조를 재확인한 것이 큰 성과다. 다카이치 총리는 과거에 야스쿠니신사 참배, 독도 영유권, 위안부 사죄 등 역사 인식과 관련해 극우적 발언을 해온 인물이다. 그는 1995년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을 반성하고 사죄의 뜻을 표명한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총리의 담화를 비판했고 위안부 강제 동원에 대해서도 이를 부정한 바 있다. 또한 한국이 다케시마(竹島·일본이 주장하는 독도의 명칭)에 무장 경비대를 상주시키거나 헬리포트, 막사를 짓는 것은 ‘불법 점거’와 다름없다는 입장을 취해왔다. 경제안전보장상 시절인 2023년에만 3차례 걸쳐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고, 일본 시마네현이 매년 주최하는 ‘다케시마의 날’ 행사에도 차관급이 아닌 장관급 인사를 보내야 한다고 꾸준히 주장해왔다. 그런 이유로 한국에서는 다카이치 총리 시기에 한일관계가 경색될 가능성을 우려해왔다.

      하지만 막상 이재명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다카이치 총리는 “일본과 한국은 서로에게 중요한 이웃 나라”이며, 구축해 온 한일관계를 바탕으로 “미래지향적이고 안정적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고 언급했다. 양 정상은 “이웃 국가이자 공통점이 많다”는 인식을 공유하며, 급변하는 국제정세·통상환경 속에서 양국이 미래지향적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이번 회담은 다카이치 총리 취임 9일 만에 이루어진 첫 한일 정상회담으로, 양국 관계에 있어 새로운 출발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양측은 셔틀 외교(정상단·외교장관 등 간 상설 방문 및 대화 재개)를 유지·강화하자는 데 공감대를 이뤘다. 하지만 그 신호가 실제 실행력 있는 협력 사업으로 전환되어야만 이번 회담의 가치가 지속될 것이다. 한일 양국 모두 미래지향 협력을 말한 만큼, 실제로 기술·경제·문화 분야에서 가시적 진전을 만들어야 한다. 회담 결과물이 대부분 언급 수준·합의 문건 수준이지, 즉시 가시화 가능한 실행계획으로까지 구체화되진 않았기에 역사·안보·무역 등 가장 복잡하고 민감한 현안들에 있어서 실무이행, 모니터링, 성과창출의 후속체계 구축이 아직 숙제로 남아 있다.
    1) 이동규, “2025년 한중 정상회담의 의미와 과제,” 아산정책연구원 「이슈브리프」 No. 2025-35 (2025.11.06.).
    | 경주 APEC은 다자협력 부활의 불씨가 될 수 있을까?
      경주 APEC 정상회의는 중요한 양자회담 때문에 관심을 끌었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번 회의가 흔들리는 규칙기반 국제질서와 다자협력 체제를 되살리는 불씨가 있을지 여부다. 트럼프 2기 들어 더욱 강해져서 돌아온 미국우선주의는 전세계를 유례없는 불확실성과 대결적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다. 미국은 2차대전 이후 규칙기반의 국제질서를 설계하고 인도한 자유세계의 지도자로서 세계질서 유지를 위한 공공재를 제공해왔다. 그동안 미국은 안보공약을 통한 글로벌 질서 유지, 자유로운 무역통상 질서 유지를 주도해왔지만 이제 그러한 역할을 중단하고 미국의 국익을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이기적 초강대국으로 변모하는 중이다. 그리고 국제기구나 레짐을 통해 작동하던 글로벌 거버넌스는 뒷선으로 후퇴하고 적나라한 힘과 이익의 잣대가 그 자리를 대신할 전망이다.

      최근의 국제질서 변화를 주도하는 것은 미국, 정확히는 트럼프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 흔히 마가(MAGA)로 불리는 운동을 주도하는 세력이다. 20세기 들어 미국은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자유주의 국제주의(liberal internationalism)’ 독트린을 추구하는 ‘자비로운 패권국(benign hegemon)’으로서의 역할 정체성을 구축했다. 오늘날 탈단극 시대를 맞아 미국의 자아상은 본질적으로 비자유주의적·강압적 패권국, 더 나아가 일반적인 이기적 강대국으로 역할개념을 전환하는 길목에 들어섰다.

      외견상 혼란스러워 보이는 트럼프의 정책은 실상 미국과 세계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일관된 계획이다. 트럼프와 그 측근들은 국내적으로는 미국 국가정체성의 근본인 가치, 규범, 목표를 개혁해 미국을 비민주적이면서 근본적으로 보수적, 내향적 국가로 만든다는 비전을 갖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미국의 국제적 역할 개념을 재정의함으로써 전세계 온갖 문제에 개입해오던 세계경찰의 역할을 하지 않으려 한다. 미국 우선주의의 기본 시각은 미국이 그동안 국제사회에서 다른 나라들의 이익을 우선시하다가 무임승차와 푸대접을 받게 됐다고 본다. 따라서 미국은 앞으로 규칙기반 안보 및 경제 질서의 보장자로서 역할을 중단하고 미국에게 직접 이익이 되는 방식의 거래적 접근을 하겠다는 것이다. 경제적 협력보다는 강압을, 광범위한 국제적 가치보다는 미국의 직접적인 이익을 우선시하겠다는 것이다. 안보 측면에서 이는 미국의 안보공약과 보장을 줄이는 대신 동맹과 우방의 방위분담을 늘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와 함께 규칙기반 국제질서의 근간이었던 각종 국제기구와 제도 참여를 제한한다.

      미국의 정체성 변화는 미국만의 변화로 그치는 게 아니라 글로벌 질서의 성격과 방향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사실상 2차대전 이후 국제질서는 ‘미국의, 미국에 의한, 미국을 위한’ 질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미국이 스스로 2차대전 이후 유지해왔던 패권적 자리에서 내려섬으로써 규칙기반의 국제질서는 이제 다극화 질서로의 변화 과정에 들어선 것으로 평가된다. 미국과 서구가 지배해온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퇴행하고 국제적 규범이나 제도, 룰보다는 ‘돈과 힘’이 지배하는 새로운 국제질서 시대가 개막한 것이다. 규칙기반의 국제질서가 물러난 공백은 다극화 질서, 얄타 2.0 혹은 강대국 세력권 정치의 부활로 채워질 것으로 예상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규칙기반 국제질서의 붕괴를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는 사건이 이다. 우크라이나의 영토주권을 침범한 러시아에 대해 서구사회는 아무런 효과적인 대응을 못하고 있다. 규칙기반 국제질서의 약화를 보여주는 또 다른 단면은 그동안 세계경제의 놀라운 발전에 기여해온 자유무역체제가 종언을 고하고 있다는 점이다.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무역대표(USTR)의 NYT 기고문에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관세정책을 새로운 무역 질서로 내세우며, 이를 통해 제조업의 부활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리어는 미국이 2차대전 이후 글로벌 무역체제 재건을 위해 시작한 브레튼 우즈 체제는 이후 WTO 설립으로 이어지면서 미국의 핵심 제조업에 대한 관세 보호를 포기하게 했고, 결과적으로 미국에게 불리한 무역질서를 초래했다고 비판했다.
    | 한국의 역할과 향후 과제
      2025년 APEC 정상회의는 이처럼 다자협력이 와해돼가는 국제질서의 중대한 변곡점에서 열린다. 이재명 대통령은 APEC 정상회의 첫 날 개회사에서 현재 한국이 처한 대외정책의 현실을 국제질서가 중대한 ‘변곡점’에 처한 ‘막중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러한 난국을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협력과 연대’만이 해답이라고 강조했다. 경주 APEC 정상회담은 국제질서의 앞날을 전망하는 중요한 시험장이 될 것이다. 트럼프발 전방위적 관세전쟁의 여파로 규칙기반의 국제질서가 위축되고 자유무역체제가 흔들리는 이 시기에 APEC 회담이 개방과 협력에 기반을 둔 다자주의 불씨를 되살리는 계기가 되려면 많은 후속 조치들이 뒤따라야 한다. 이재명 정부가 그러한 후속조치까지 이끄는 리더십을 발휘하기를 기대한다.

      이번 경주 APEC 공동선언문에 자유무역을 회복하자는 역내 국가들의 의견이 선언문에 반영될 수 있을지가 역내 국가들의 큰 관심사였다. 하지만 미국이 자유무역과 다자체제라는 표현의 사용 자체를 거부하는 상황에서 과연 자유무역 증진에 대한 회원국들의 동의를 확보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 전부터 관측이 분분했다. 미국이 과연 이를 대체할 적절한 문안과 표현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냐가 관건의 하나였다. 결국 자유무역, 다자체제, 세계무역기구(WTO)라는 단어는 이번 공동선언에 한 글자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 대신 “글로벌 무역체제가 중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으며 “회복력을 촉진하고 혜택을 제공하는 무역 및 투자 환경이 중요하다”는 모호한 표현으로 그 자리를 메꿨다. 출범 자체가 자유무역과 다자체제 질서의 한 축이기도 했던 APEC에서조차 그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된 상황을 두고, 이제는 자유무역과 다자체제의 시대가 끝났다는 자조적 평가까지 나온다. 그동안 자유무역체제와 개방된 통상질서의 챔피언이었던 미국이 물러나면서 오히려 중국이 공급망, 다자주의, 글로벌 규범을 강조하는 것은 아직은 조금 생경스럽다.

      마지막으로, 아직 완결되지 않은 한미 관세 및 통상을 조속히 무탈하게 마무리지어야 동맹 현대화 같은 중요한 양자 이슈들을 순조롭게 다룰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양국 간 합의를 정확하게 문서화해서 이견이 발생할 소지를 막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변덕스럽고 예측불가한 협상 스타일을 감안하면, 만일 향후 한미간 합의 이행을 둘러싸고 이견이 발생할 경우 새로운 갈등이 발생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이 농산물 시장을 완전히 개방할 것처럼 언급했지만, 한국 정부는 그런 합의가 없었다는 입장이다. 또한 트럼프 대통령은 엔비디아의 최신 인공지능 칩 블랙웰을 중국을 비롯한 외국에 수출하지 않겠다고 밝혔는데, 이는 엔비디아의 젠슨 황 최고경영자(CEO)가 한국 정부와 기업에 블랙웰 그래픽처리장치(GPU·지피유) 26만장을 공급하겠다는 한 것과 다른 말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승인한 한국의 핵추진 잠수함도 한국에서 건조할지 필리조선소에서 건조할지, 그리고 농축우라늄연료는 어떻게 될지 다양한 불확실성이 기다리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을 양국이 합리적으로 상호 수용가능한 수준에서 타협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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