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 공화당 내에서도 가능성을 낮게 보던 트럼프 후보의 대통령 당선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미국 정부의 전통에서 벗어난 그의 대내외 정책은 개인의 성격에서 비롯된 일탈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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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학적 전환기와 유엔 외교의 장래 |
| 2026년 7월 27일 |
윤여철
세종연구소 객원연구위원 | yoon.yeocheol@gmail.com
| 들어가는 글
2016년 11월 공화당 내에서도 가능성을 낮게 보던 트럼프 후보의 대통령 당선은 모두를 놀라게 했다. 미국 정부의 전통에서 벗어난 그의 대내외 정책은 개인의 성격에서 비롯된 일탈(aberration)로 여겨졌다. 2020년 대선을 바이든이 승리하면서 트럼프의 일탈은 역사의 한 페이지로 넘어가는 듯하기도 했다. 그러나, 민주당의 실책과 MAGA 세력의 결집으로 2024년 그의 재집권이 이루어지고 국내적으로 견제받지 않고 대외적으로 조율되지 않은 형태의 미국 우선주의 정책이 더욱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트럼프의 외교 정책은 동맹국과의 신뢰를 손상하고 미국이 스스로 구축한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파괴하고 오히려 권위주의 리더들의 이익을 인정하는 행태가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아울러 트럼프의 미국은 유엔을 위시한 각종 국제기구에 대한 지원을 철회하거나 기구를 탈퇴하여 그들의 기능을 마비시키고 있어 미국의 동맹체제와 아울러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한 기둥이었던 다자주의 체제를 붕괴시키고 있음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유엔은 그간 지적받은 일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가장 가성비 높고 효과적인 도구'로서 특정 국가가 맡기 어려운 다양한 역할을 오랫동안 수행해 왔다. 유엔은 세계 각지 분쟁지역에서 평화를 회복하고 지속시키면서 전시 민간인을 보호하며, 저개발국의 식량과 의료, 특히 아동 예방 접종 등 의료지원을 통하여 수많은 생명을 구하고 있고 특히 최근에는 인류 공동의 과제인 기후변화와 지속가능개발을 달성하는 데 있어 중심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국내외 여론은 트럼프에 대한 과거의 틀린 평가에 대한 반작용으로 트럼프의 정책이 미국 유권자들의 민심과 국제질서의 근본적인 변화를 반영하고 있어 트럼프 임기 이후에도 미국의 현행 정책이 변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소위 힘의 원리에 의한 약육강식과 각자도생이 국제사회의 기본이 되고 자유주의 및 규칙 기반 질서는 영구히 와해되었다는 진단이다. 과연 트럼프 퇴임 이후에도 미국 우선주의와 미·중 간의 지정학적 긴장이 계속 유엔 운신의 폭을 제약할지는 불확실하다. 오히려 향후 미국 국내 정세와 국제질서의 전개에 따라서는 유엔과 다자주의에 대한 재평가와 함께 유엔이 제 역할을 회복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건국 시점부터 유엔과 깊은 관계를 맺어 온 한국으로서는 냉전 종식 후에야 가입했어도 유엔에서 눈부신 활동을 하며 국제사회의 도움에 보답하고 인류 공동과제의 해결에 참여해 왔다.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유엔을 무시한다고 해서 우리마저 덩달아 유엔 외교를 방기하는 행태는 현명하지 않다. 미국 같은 강대국이 아닌 중견국인 한국에는 다자주의1)가 국익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유엔은 한국의 국제사회에 대한 기여의 무대임은 물론 앞으로도 계속될 한반도 문제 논의의 장으로서 중요하기도 하다. 한국은 유엔 선도국으로서 우리가 주도할 유엔 의제를 적극적으로 개발하여 이끌어가고 주유엔 대표부의 역량을 더욱 강화하고 우리 국민의 유엔 사무국 진출을 확대하여 유엔 운영에 중심 역할을 담당하고 국익도 확보해 나가야 할 것이다.
| 유엔 역할의 진화와 새로운 난관
19세기 이후 세력균형 원칙을 바탕으로 유지되던 영국 패권 중심의 Pax Britannica가 1차대전으로 붕괴한 후 국제사회는 국제연맹을 창설하여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제도화하고 최초의 집단안보 제도를 도입한다. 그러나 강제조치 권한이 없고 미국의 참여가 없는 국제연맹은 독일과 일본의 유럽과 아시아에서의 침략을 저지하는 데 실패하고 2차대전을 맞이한다. 이러한 국제연맹의 실패를 거울삼아 2차대전 후 미국은 특권을 부여받은 주요 동맹국과 안보리를 구성하여 강화된 집단안보 체제를 구축하고 전쟁 재발을 막겠다는 야심 찬 목표 아래 유엔을 창설한다. 유엔은 미국이 구축한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과 함께 전후 자유주의 질서의 중심축 가운데 하나로 기능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미·소 초강대국 간 경쟁으로 전개된 동서냉전과 세계 각지에서 발생한 양 진영간 대리전 속에, 전쟁과 평화의 결정을 내려야 하는 안보리는 미·소의 공방과 거부권 행사로 기능이 저하된다. 한편, 과거 제국주의 식민지에서 독립한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의 다수 신생국이 유엔에 가입하면서2) 총회의 담론을 주도하게 된다. 총회는 후진국 개발 문제와 불평등 해소에 국제사회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관련 기구도 창설하면서 많은 진전을 이루지만, 구 식민지 종주국들인 서방에 대한 저항이 표출되고, 수차에 걸친 중동전쟁 관련 이스라엘의 일방조치와 그를 비호하는 미국에 대한 성토장이 된다. 미국은 점차 자신이 창설한 유엔에 대한 회의적 시각을 갖게 되고 특히 유네스코 등 기구에서 친소련 성향과 반미/반이스라엘적 입장이라는 이유로 미국이 탈퇴(1984)하고 복귀(2003)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비록 냉전 구도하에서 유엔이 집단안보를 실현한 사례는 한국전쟁뿐이지만, 국제문제가 대두될 때마다 유엔은 토론과 숙의를 통한 분쟁의 평화적 해결의 장으로서 역할을 해왔다. 분쟁 자체를 막지는 못한 경우에도 일단 휴전이 성립된 후의 평화유지군 배치를 통한 평화의 지속과 분쟁 하의 민간인 보호에 중요한 기여를 하고 있다. 아울러 유엔은 평화와 함께 유엔 목표의 3대 축을 이루는 개발과 인권 문제에 대해서도 국제여론을 환기하고 재원을 결집하여 새로운 기구를 설립하고 규범을 개발하는 역할을3) 계속 수행해 왔다.
1990년대 들어 소련의 붕괴로 동서냉전이 종식되고 미국 중심의 일극 체제가 자리 잡자, 미국(클린턴 정부)은 민주주의 가치의 확산과 세계화를 추진하고 각료급으로 격상된 주유엔 미국 대사(올브라이트)도 이 작업에 동참하면서 유엔의 역할도 강화되었다. 물론 2001년 9/11 사태로 인해 새로운 국제질서하에서 비국가행위자(non-state actor)에 의한 테러 위협이 대두했으나 이 또한 유엔을 중심으로 기민한 대응을 하면서4) 국제사회가 단합된 모습을 보였다. 유엔은 2000년 개최된 '새천년 정상회의'에 맞춰 8개의 새천년개발목표(MDGs)를 채택하고 인류의 미래를 향해 이끌어 가는 역할로 각광받았다.5) 2007년부터 유엔사무국을 이어받은 반기문 총장의 지속적인 독려와 함께 목표연도 2015년까지 전 세계가 노력한 결과, 절대빈곤을 반감하는 등 국제사회는 새천년개발목표를 대부분 달성한다. 반기문 총장은 2015년에는 기후변화, 젠더, 생물다양성까지 아우르는 광범위한 17개의 지속가능개발목표(SDGs)를 채택하여 인류의 미래를 담보하기 위한 지구 차원의 노력을 결집하는 구심점이 되었다. 특히 2015년 12월 채택된 기후변화에 대한 파리협약은 지구 기온상승을 2.0도 이하로 막기 위해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실현하는 국가별 감축목표(NDCs)를 중심으로 한 전략을 채택하는 성과를 이루었다.6)
그러나 2016년 트럼프 대통령 당선 이후 특히 트럼프 2기가 개시한 후 미국 우선주의 기치 아래 다자주의에 대한 무관심과 각종 국제기구에 대한 지원 철회로 유엔의 위상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특히, 유엔 헌장 수호의 책임이 더 중한 상임이사국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안보리가 분열되고 유엔의 유용성에 대한 회의론이 회원국들 사이에 퍼지고 있다.
| 트럼프의 미국과 유엔의 다자주의
먼저 트럼프 행정부는 '미국 우선주의' 정책 기조에 따라 유엔 기구들의 자금을 동결하고 연쇄적으로 탈퇴하며 다자주의 체제를 약화한다. 2017년 10월 반이스라엘 성향과 분담금 연체 문제를 이유로 유네스코 재탈퇴를 선언하고7) 2018년 6월 UN 인권이사회(UNHRC)를 "정치적 편향의 온상"이라 비판하며 탈퇴했으며 2018년 8월 팔레스타인 난민 구호기구(UNRWA)에 대한 미국 측 지원금을 전면 중단했다. 2020년 7월에는 코로나19 팬데믹 와중에 세계보건기구(WHO)가 친중국 성향을 보인다며 공식 탈퇴 절차를 시작했다.8) 아울러 평화유지군 예산과 UN 핵심 분담금의 상한선을 깎거나 지급을 보류하여 UN 전체에 심각한 재정난을 안겼다.
2025년 1월 트럼프 2기 취임 첫날, 바이든 행정부가 재가입했던 파리 기후협약에서 재탈퇴하고 WHO 탈퇴 절차를 다시 추진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2025년 2월에는 모든 국제기구에 대한 미국의 지원과 회원국 자격을 180일간 전면 재검토하는 행정명령을 내리면서 이 과정에서 UN 인권이사회 재탈퇴 및 UNRWA 자금 지원 영구 금지가 확정되고 2026년 1월에는 미국의 글로벌 이익에 부합하지 않고 편향된 이념을 전파한다는 이유로, 31개 UN 산하 기구를 포함한 총 66개 국제기구에서 동시 탈퇴하도록 지시하는 대통령 각서에 서명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이러한 조치는 유엔의 능력을 크게 위축시켰으며, 국제사회의 글로벌 기후변화 대응력 약화뿐 아니라 역설적으로 다자외교 체제 내 미국의 영향력 축소라는 결과를 낳았다.9)
트럼프 행정부의 이러한 조치는 ① 다자 기구들이 미국의 독자적인 사법·행정권과 국가 주권을 침해한다, ② 미국 납세자들의 돈을 글로벌 관료들이 낭비하고 있다,10) ③ UN 기구들이 미국의 전통적 가치와 충돌하는 "급진적 기후 정책 및 좌파적·정치적 이념"을 전파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culture war), ④ 미국이 국제기구의 재정을 책임지는데 다른 회원국들은 대미 비난만 하는 '무임승차(Free-Riding) 구조'를 더 이상 묵과하지 않겠다는 논리에 기초하고 있다. 이는 NATO 회원국에 대한 분담금 증액 압박과 같은 '미국은 더 이상 이용당하지 않겠다'는 심리에서 발현되는 메시지라고 해석된다. 따라서 미국은 이 기구들에서 완전히 손을 떼고, 이보다는 미국의 압력을 효과적으로 구사할 수 있는 양자 협상 방식으로 최대한 이익을 확보하면서 국제 관계를 주도하겠다는 외교적 계산이 깔려 있다고 분석된다.
한편, 미·중 전략 경쟁 심화와 지정학적 긴장과 아울러 우크라이나 침공이라는 명백한 국제법 위반을 자행한 러시아에 의해 분열된 안보리는 이 침략행위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있다. 한편, 하마스의 공격을 받은 이스라엘이 가자지역 주민에 대한 과도한 비인도적 봉쇄를 자행하는 가운데 미국이 이스라엘을 위해 6번에 걸쳐 거부권을 사용하고, 급기야 미국 자신이 국제법 위반 비난을 받는 베네수엘라와 이란 침공 행위를 감행한다. 이에 따라 계속되는 유엔 안보리나 총회에서의 공방으로 유엔은 신뢰성과 효용성에 대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 속에 유엔은 제10대 사무총장을 선출하기 위한 경선에 돌입하고 후보들은 장래 유엔의 역할과 위상을 확립하는 비전을 제시하고자 고심하고 있다.
| 제10대 국제연합 사무총장 선거
유엔 사무총장은 최초 2인(노르웨이의 트리그베 리, 스웨덴의 다그 함마르셸드)이 유럽에서 나온 이후 비공식적으로 지역그룹11) 순서로 선출해 온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가장 큰 발언권을 가진 미국의 경우 지역그룹 순환제를 인정하지 않고 후보의 능력(merit) 위주 선출 원칙을 강조하고 있으나 지역그룹 순환 원칙을 따른 후보를 거부한 바는 없다. 또 하나의 요인은 제8대 반기문 총장 선출 때부터 대두해 온 여성 사무총장 선출 요구가 제9대 구테흐스 총장 선출 때에도 좌절된 바 있어 이번에야말로 여성 사무총장을 선출해야 한다는 여론이 더욱 높아진 상태이다. 유엔 사무총장 후보에 대한 미국의 지지는 원래 가장 중요하기도 하지만,12) 세 번째 요인은 모든 사안에 자신의 선호를 강하게 반영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성향이다. 더구나 트럼프는 유엔의 전통이나 여성 사무총장 배출 여론에 별로 관심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경선 과정에 뛰어든 중남미 지역그룹 후보13)는 칠레의 미첼 바첼렛 전 대통령(전 유엔여성기구 사무총장, 전 유엔인권고위대표), 아르헨티나의 라파엘 그로시 현 IAEA 사무총장, 코스타리카의 레베카 그린스판 전 부통령(전 UNCTAD 사무총장), 에콰도르의 마리아 페르난다 에스피노사(전 외교장관), 뒤늦게 경선에 참여하기로 한 가이아나의 캐롤린 로드리게스 비르켓 현 주유엔 대사가 있으며 이들 가운데 그로시만 남성이다. 아울러 중남미 그룹이 아니지만 입후보한 마키 살 전 세네갈 대통령이 있다. 외견상으로는 여성으로서 칠레 대통령을 두 번 역임한 바첼렛 후보가 가장 높은 위상을 보이지만, 자국 대선에서 보수 후보가 당선되면서 바첼렛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대신, 트럼프와 거리가 있는 좌파 정권 브라질과 멕시코의 추천으로 나와 있는 상태이다. 그로시 사무총장의 출신국 아르헨티나의 밀레이 대통령은 우파 정책으로 트럼프의 총애를 받고 있어14) 사무총장 경선에서도 그러한 지지가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되고 있다.
물론 중국과 러시아도 중요한 상임이사국이므로 이들의 선호도 중요할 것이나, 현재까지는 이 두 국가는 선호 후보를 명시하지 않고 있다. 프랑스는 전통적으로 사무총장의 불어 구사 능력을 중시하면서 실제로는 평화유지 담당 사무차장직에 프랑스인 임명을 거부권 불행사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어, 코피 아난 이후 사무총장들은 이 요구를 수용하고 있다. 영국은 나름 엄격한 능력 위주의 기준을 제시하고 있으나 거부권까지 가는 경우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포클랜드/말비나스 분쟁 관련 유엔의 중립성 훼손 가능성을 우려하여 아르헨티나 후보에 비우호적일 수 있다고 보도되기도 하나, 거부권 행사까지 갈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보인다.15)
조만간 안보리에서 "Straw Poll"이라 불리는 비공식 투표가 시작될 예정이다. 안보리는 수차에 걸친 투표를 통해 어느 후보에게 상임이사국의 거부권 행사 없이 다수 이사국의 지지가 모이는지 가늠한다. 이사국 지지가 특정 후보에 수렴되는 것이 확인되면, 안보리는 공식 투표에 부쳐 만장일치로 동 후보를 지명하여 총회에 '추천'하고 총회도 이를 대개 만장일치(acclamation)로 최종 선출한다. 새 사무총장은 초기 2년을 트럼프 대통령과 공존하면서 유엔의 재원을 확보하고 고유의 역할을 되찾기 위한 노력을 당분간 최우선 순위로 삼을 것이다. 유엔은 회원국이 구성하고 이끌어가는 조직이지 사무국이나 사무총장이 주인인 조직이 아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사무총장 선거는 국제사회가 다자외교의 효용성을 상기하고 유엔을 새로이 활성화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남은 트럼프 대통령 임기 중 미국의 대유엔 정책이 현행대로 지속될지, 트럼프 이후 미국 외교 정책이 어떻게 변화할지, 그리고 강대국 간 지정학적 대결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예견하기 어렵다. 유엔은 지난 80년간 국제정세에 따라 우여곡절을 겪어 오면서도 다시 국제 외교의 중심으로 돌아오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회복력을 견지해 왔다. 결국 2028년 미국 대선의 결과에 좌우되겠으나 그간의 트럼프 정부의 비전통적 정책에 반발한 국제사회는 자유주의 질서 회복에 대한 열망과 함께 다자주의와 전 인류를 위한 기구인 유엔의 역할을 다시 활성화해 나갈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대한민국 대유엔 외교에 대한 함의
대한민국은 태생부터 유엔과 직결되었던 국가로서, 동서냉전으로 남북한은 옵서버 국가로만 참여하고 정식 가입하지 못하였다. 유엔은 주로 남·북 대결의 장으로 활용되던 중 1991년 냉전 종식과 함께 남북한은 유엔에 뒤늦게 동시에 가입했다. 그 후 한국은 유엔 무대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기여해 왔다. 한국은 35년 기간 중 안보리 이사국을 3회(1996-1997, 2013-2014, 2024-2025) 역임하고 제56차 유엔총회 한승수 의장(당시 외교통상부 장관), 제8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2007-2016)을 배출한 주도국이다. 지난 6월 23일 개최된 제주 포럼에는 유엔 사무총장 후보들이 빠짐없이 참석하여 자신들의 정견을 발표하고 반기문 총장의 지지를 희망했다.16) 이는 한국이 현행 안보리 이사국은 아닌데도 다자외교 무대에서 차지하는 위상, 그리고 재직 시절 많은 업적을 남긴 제8대 반기문 사무총장에 대한 국제사회의 폭넓은 존경심을 반영한 사례로 평가된다.
현시점에서 유엔의 역할과 위상이 제한되는 현상을 일시적으로 겪고 있으나, 현 미국 정부와 같은 유엔 경시 태도를 한국 정부가 답습하는 것은 한국의 처지와 맞지 않는다. 한국은 미국과 같은 국제질서를 좌지우지하는 강대국이 아니며, 우리 같은 중견국에 유리한 다자주의 질서를 적극 활용하고 더욱 보호해야 하는 처지에 있기 때문이다.17) 따라서 한국은 유엔 무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노력을 전개해야 한다.
우선 유엔에 소극적이던 트럼프 1기 기간에도 목격했듯이,18) 미국 정부의 태도와 관계없이 한반도 평화와 안보 관련 쟁점 사안은 유엔에서 치열하게 논의되고 그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여론을 좌우하게 된다. 한국 정부는 빈틈없이 입장을 수립하고 이를 세계인의 토론장인 유엔 무대에서 명확하게 제시하며 더욱 첨예해 가는 한반도 정세 속에서 국제사회의 지지를 확보하고 국익을 수호해야 할 것이다. 이는 지정학적 갈등과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하여 중·러가 북한을 비호하면서 안보리가 분열된 현 상황에서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유엔의 마비된 안보리 체제하에서 창의적인 방법으로 우리 국익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한국 정부는 러시아의 거부권으로 해체된 안보리 대북 제재 패널을 대신하는 다국적제재모니터링팀(MSMT, Multilateral Sanctions Monitoring Team)을 미국과의 긴밀한 협력하에 11개 우호국으로 구성하여 2024년 10월 출범한 바 있다.19) 한국은 이 조직을 유엔 내 한반도 문제 전략 수립의 거점으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2005년부터 유엔총회가 채택해 온 북한인권 결의안 관련, 한국은 일관되게 지도력을 발휘하면서 북한 주민 인권 개선을 위한 국제사회의 관심을 유도하고 보편적 인권을 수호하는 인권 선진국의 위상을 유지해야 할 것이다. 북한인권 결의안 채택 과정에서 형성된 유사입장국 특히 중견국들과의 협력 네트워크도 우리의 대유엔 외교의 중요한 기반으로 활용할 수 있다.
유엔은 보편적 기구로서 인류가 직면한 공동문제에 대응하는 역할에 안성맞춤인데, 한국은 이 분야에서도 선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특히 한국이 기술적으로 앞서가는 인공지능 문제를 비롯한20) 디지털 거버넌스 및 기후변화 대응과 같은 미래형 사안에서 더욱 적극적인 역할을 해 나가야 한다. 한국은 유엔에서의 각종 이니셔티브를 통해 글로벌 사우스에 대한 협력도 강화하고 우리 유엔 외교의 저변을 확대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한국은 경제사회이사회 의장 및 평화구축위원회 의장을 역임한 경험을 살려서 관련 의제를 선점하면서 경제개발 수요 및 분쟁 해소 당사자가 많은 글로벌 사우스에 대한 outreach도 계속 추진해야 할 것이다.
한편, 한국은 2022년 이래 제9위21)공여국으로22) 2026년 유엔 정규예산 35억 불의 2.349%인 681만 불을 내고 있다.23) 문제는 공여하는 금액에 비해서 우리 국적 직원의 유엔 사무국 진출이 너무 저조하다는 것이다.24) 유엔 자료에 의하면 2025년 기준 유엔 시스템 전체의 120,176명 가운데 한국 직원은 665명으로 0.6%에 불과하고25) 정부 장·차관에 해당하는 고위직인 사무차장(Under Secretary-General, USG)이나 사무차장보(Assistant Secretary-General, ASG)는 한 명도 없다.26) 유엔 직원은 국제공무원으로서 자국의 이익이 아니라 세계 전체, 인류 전체의 이익을 위해 복무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주요국들은 아무리 유엔이 위상이 낮아졌어도 유엔의 주요 부서와 주요 보직에 자국 직원들을 포진시켜서 외부에 공유되지 않는 유엔 사무국 내부 동향을 관찰하고 내부 토론에서 자국 입장을 적절히 반영하게 하는 전략적 포석을 하는데 우리는 이러한 인사가 전혀 없는 상황이다.
정부는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과 국익을 위해 유엔 사무국 고위직에 자격을 갖춘 한국인의 진출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추진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향후 유엔 고위직을 맡아도 손색이 없는 자원을 생산해 내는 장기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우선 유엔 사무국에 한국 젊은이들이 많이 지원하고 채용되도록 지원하여 그들이 내부에서 경력을 쌓고 승진을 거쳐 자연스럽게 고위직으로 올라가는 파이프라인 구조를 구축하고, 동시에 일반 외교관 중에서도 사무국 파견 근무 기회를 제도적으로 대폭 늘려 보다 많은 외교관이 근무 경험을 쌓고 향후 국제기구에서 경쟁력 있는 자원이 되도록 양성되어야 할 것이다.
정부는 아울러 주유엔 한국대표부 자체도 전문성과 책임감 있는 직원들로 확충하고27) 가급적 장기 근무를 유도하여 전문성 심화와 함께 사기를 진작하고 임무를 확장해야 한다. 현재 진행 중인 차기 유엔 사무총장 경선 과정도 예의 주시하고 차기 유엔 사무국 지도부와의 협력 체제 구축, 사무국 고위직 진출을 위한 협력 확보, 한반도 의제 관련 우호국 네트워크 구축, 유엔 각급 회의에서 한국 정부가 주도할 의제 개발 등에 대한 효과적인 전략을 정립하여 유엔 내에서 발언권을 강화하고 지도력을 발휘하는 노력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28)
2차대전 이후 자유주의 국제질서 수호의 일익을 담당해 온 가장 보편적인 국제기구인 유엔이 인류에게 중요한 새로운 분야의 규범을 설정하는 역할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우리 정부는 이 과정에 국제사회의 흐름을 정확히 읽어내고 우리 입장을 적극 반영해야 한다. 특히 향후 국제질서를 좌우하는 새로운 사안에 대해서는 적극 참여하여 토론 주도는 물론 동맹 및 우호국과 상호 지원을 강화하면서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의 선도적인 역할을 지속해야 할 것이다.
- 여기서 다자주의 체제는 단순히 세 나라 이상이 참여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여러 나라가 협조하여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체계를 구축한 후 참가국이 동등하게 규정을 준수해 나가는 체제를 의미한다.
- 당초 사무총장은 안보리와 총회의 결정 사항을 행정적으로 집행하는 역할(chief administrator)만 담당하나, 미소 간 대립으로 안보리와 총회가 분열되고 사무총장과 사무국이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면서 사무총장의 역할과 권한도 점차 확장되고 원래 회원국의 모임인 유엔의 상징이 되어 간다.
- 유엔의 기여는 유엔 및 산하 기구가 받은 노벨평화상을 통해 인정받았다. 1954년, 1981년 유엔난민기구(UNHCR); 1965년 유엔아동기금(UNICEF); 1969년 국제노동기구(ILO); 1988년 유엔평화유지군 (PKO); 2005년 국제원자력기구(IAEA); 2007년 정부간기후변화패널(IPCC); 2001년에는 '코피 아난과 유엔'이 수상하여 유엔 조직을 대표하여 한승수 유엔총회의장이 함께 수여받았다.
- 테러리즘 지원을 불법화한 안보리 결의 1373 채택, 동 결의 이행을 위한 대테러위원회(Counter-Terrorism Committee, CTC) 및 사무국 내 지원 기구(CTED) 창설; 안보리 결의 1267 위원회의 각종 테러단체 제재; 총회의 대테러세계전략(UN Global Counter-Terrorism Strategy) 채택, 테러 관련 각종 협약의 신속한 성안 및 비준 등 성과
- 다만,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안보리의 승인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전개되고 이에 대한 비판을 제기했던 코피 아난 사무총장이 미국의 지지를 잃고 Oil-for-Food-Programme(OFFP)의 부패와 그의 아들 연루에 대한 수사로 순식간에 추락하면서 유엔이 얼마나 강대국의 지지 여부에 취약한지가 드러났다.
- 반기문 총장은 선출 당시는 물론, 평소 신념과 달리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첫 유엔 정상회의에도 참석하는 부시 대통령의 도움을 취임 초 2년간 받았으며, 이어지는 8년은 다자주의를 포용하는 오바마 대통령과 함께 일하면서 많은 업적을 쌓을 수 있었다. 반 총장은 다행스럽게도 2017년 1월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전 2016년 말에 임기를 마쳤다.
- NYT (2017.10.12.) U.S. Will Withdraw From Unesco, Citing Its 'Anti-Israel Bias'
- ABC (2025.1.23.) US officially exits World Health Organization, accusing agency of straying 'from its core mission'
- Euronews (2026.1.8.) Trump withdraws US from UN climate treaty and 65 other global bodies
- Washington Examiner (2026.5.1.) The United Nations demands billions from American taxpayers
- 3대 아시아/버마 우탄트 - 4대 유럽/오스트리아 발트하임 - 5대 중남미/페루 케야르 - 6대/7대 아프리카/이집트 가나 갈리/아난 - 8대 아시아/대한민국 반기문 - 9대 유럽/포르투갈 구테흐스
- 반 총장 선출 당시는 미국의 지지가 필수적이면서도 경선 초기부터 미국의 선택이라고 알려지면, 미국의 하수인이라는 중 러의 의심을 사서 그들의 거부권 가능성을 높인다는 차원에서 미국의 공개 지지는 "kiss of death"라고 불렸는데 금번 선거에서는 초기부터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되고 있다.
- 중남미 그룹은 유엔에서 GRULAC(Group of Latin American and Caribbean Countries)이라고 불리며 멕시코 이남 중남미 전체와 아울러 카리브해 도서 국가를 모두 포함한다.
- 2025.10. 트럼프 정부가 아르헨티나 중간선거 직전 아르헨티나의 통화 안정을 위한 200억 불의 통화 스왑을 제공한 사례가 이를 입증한다.
- 영국은 2016년 사무총장 경선에 나온 Susana Malcorra 전 아르헨티나 외교장관(전 반기문 총장 비서실장) 입후보에 대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였고 2022년 ICJ 재판관 선거에서도 영국 단체들이 아르헨티나 후보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최근 월드컵 경기에서 촉발된 포클랜드/말비나스 논쟁이 영국의 입장에 영향을 미칠지 불확실하나 가급적 미국 입장에 맞추고자 할 것으로 전망된다.
- 중앙일보 (2026.6.26.) 제주에 집결한 차기 유엔 사무총장 후보들..."유엔 개혁" 한목소리
- 경제학에 비유하자면 우리는 시장의 가격을 결정(price-setter)하는 독점생산자가 아니라 시장에서 형성된 가격을 수용(price-taker)하여 우리의 생산구조를 설정하는 시장참여자이기 때문이다.
- 트럼프 1기 기간인 2017년 3월부터 2018년 3월까지 유엔 안보리는 미·중·러의 참여 속에 북한에 관한 6개 결의(2345, 2356, 2371, 2375, 2397, 2407)를 채택하였다.
- YTN (2024.10.16.) 대북제재 위반 감시 다국적모니터링팀(MSMT) 설립
- 대한민국은 2025년 9월 안보리 의장국으로 "인공지능과 국제 평화·안보"를 주제로 한 공개토의 등을 주도한 바 있다. 특히 유엔총회 기간 중이어서 각국 정상이 참석하는 안보리 회의를 대한민국 정상이 주재하여 지도력을 발휘하는 좋은 기회였는데 더 적극적으로 활용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 미국, 중국,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캐나다 다음
- 조선일보 (2023.12.5.) YS-박근혜 이어 尹정부서 안보리 진출... '국력 상징' 유엔 분담금 세계 9위
- 유엔 평화유지군 예산도 한국이 9위(총 54억 불 중 1,266만 불)
- 유엔 분담금 규모가 큰 국가는 보통 자국직원의 사무국 진출에 더 발언권을 갖고 적극 지원한다. 유엔 직원은 근무지의 세금을 내지는 않으나 유엔은 그들의 보수의 일정 비율을 세금 개념으로 공제하고 그 액수를 출신 국가의 기여금에서 감액하는 방식으로 결국 자국에 세금을 내는 효과를 낸다.
- UN CEB/Chief Executive Board Website, Human Resources Statistics
- 조선일보 (특파원리포트, 2026.6.12.) '제2의 반기문' 없는 한국 외교
- 천영우 (조선일보, 2026.6.15.) 특임공관장 제도의 남용, 도를 넘었다
- 한국이 1995년, 1996년 안보리 비상임 이사국을 역임할 당시에는 코피 아난 사무총장을 선출하는 과정에 참여하면서 우리 최초의 사무차장보(최영진 DPKO/평화유지부 군수 담당 사무차장보, 2005년 주유엔대사 역임)를 배출한 바 있는데, 최근 이사국 역임 기간(2024-2025)도 차기 사무총장 선출 과정에 관여할 수 있는 기간을 전략적으로 선택하면 고위직 인선 차원에서 유리할 수도 있었다는 아쉬움도 있다.
※ 본 세종포커스에 게재된 내용은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으로 세종연구소의 공식견해가 아님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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